제2장 ‘LG’의 이름으로 ‘따로 또 같이’ 성장하다(1985-1999)

1. 금성알프스전자에서 LG전자부품으로

매머드 공장 광주공장의 준공

1980년대 초 전자산업의 호황이 지속되면서 금성알프스전자는 대규모 신공장 건립에 나섰다. 금성알프스전자는 광주광역시 하남공단에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1984년 3월 기공식을 했다. 금성알프스전자는 광주공장을 튜너 및 헤드 전문생산공장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기존의 양산공장은 SR(스위치, 가변저항기, 바리콘 등) 및 신제품 개발에 집중하도록 역할을 분담시켰다. 금성알프스전자의 초기 생산을 전담했던 부산공장은 광주공장 착공과 함께 생산시설을 양산공장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 금성알프스전자, 광주전자부품공장 기공(1984)

  • 금성알프스전자, 광주전자부품공장 준공(1985)

부산공장은 1984년 7월 생산시설 이전을 완료하고 14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광주공장은 1984년 12월 부분 준공과 함께 튜너와 헤드 등의 생산을 개시했다. 이로써 금성알프스전자는 양산공장과 광주공장으로 이뤄진 2개의 생산지 운영체제를 갖췄다.
광주공장 준공식은 구자경 그룹 회장을 비롯한 200여 명의 내외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1985년 4월 3일 개최됐다. 호남지역에서 전자업체가 설립된 것은 처음이었다. 준공 당시 대지 7만 4,810㎡(약 2만 2,630평), 연건평 3만 2,780㎡(약 9,916평) 규모로 지어진 광주공장은 컬러TV용 튜너 800만 개, 오디오용 튜너 250만 개, VCR용 영상 헤드 600만 개, 오디오용 헤드 2,400만 개 등의 생산능력을 갖춘 매머드 공장으로 탄생했다. 광주공장의 건설을 계기로 종합전자부품회사의 면모를 갖춘 금성알프스전자는 전자식 튜너와 마그네틱 헤드를 본격적으로 양산했다. 1986년에는 매출 규모가 1,000억 원대로 커졌다.

금성알프스전자, 광주공장을 둘러보는 구자경 명예회장(1985)

모듈과 모터 사업 개척

1990년대에 금성알프스전자는 사업영역을 더욱 확대했다. 1992년 7월에는 희성금속공업에서 HIC(혼성집적회로) 사업을 인수했다. 이는 그룹 차원에서 마련한 부품사업 육성 종합계획에 따른 결정이었다. 때마침 신규사업 진출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금성알프스전자는 1992년 7월부터 HIC 사업 인수와 함께 제품 생산을 본격화했다
HIC는 기판에 IC, 콘덴서, 인덕터 등의 소자부품을 정밀 집적화한 전자회로 모듈이었다. 기기의 소형화와 경량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온도, 습도, 진동, 충격 등의 악조건에서도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우수한 기능을 가졌다. 또한 개발 기간이 짧고 적기 양산 대응이 가능한 것도 장점이었다.
금성알프스전자는 금성통신 오산공장에 있던 HIC 생산라인을 1993년 12월 광주공장으로 설비 이전하고, 광주공장에서는 ECU(전자식 엔진제어장치), TCU(자동변속제어장치) 등의 자동차 전장용 HIC와 이동통신용 HIC를 개발하고 양산했다.
1993년 1월에는 그룹 차원의 부품산업 육성정책에 따라, 금성알프스전자가 금성사(현 LG전자) 소형 모터 사업을 인수 했다. 금성사 구미공장에서 생산해오던 모터 사업 설비를 양산공장으로 이전해 1월 6일 첫 제품을 생산했다. 모터는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일반 가전제품은 물론 컴퓨터 등 사무기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전자제품을 구동시키는 핵심부품이다. 금성알프스전자는 모터 사업 인수 후 HDD(Hard Disk Drive) 구동에 필요한 고성능 모터 등을 출시하면서 수입대체에 앞장섰다. 또한 기술축적을 통해 캠코더용 캡스턴모터와 드럼모터 국산화에도 성공하고 양산체제를 구축했다. 한편 VCR용 모터를 생산함으로써 VCR용 헤드뿐 아니라 모터까지 VCR 부품 일괄생산체제를 갖추었다. 모터 생산이라는 신규사업을 통해 금성알프스전자의 사업구조에도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모듈에서 모터까지 사업 다각화와 더불어 국내 가전사업과 동반성장을 가속하면서, 금성알프스전자는 1993년 매출이 2,000억 원대를 돌파했다.




LG전자부품으로 새 출발

1995년 2월 구본무 그룹 회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그룹 CI를 럭키금성에서 LG로 변경했다. 이에 그룹 계열사들도 LG라는 사명으로 CI를 바꾸었고, 금성알프스전자도 사명을 LG전자부품으로 변경했다. LG전자부품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주력제품이던 스위치와 가변저항기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사업 전반의 수익성이 악화됐다. 1995년부터 적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LG전자부품은 1996년 12월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 종료에 합의했다. 1997년 2월에는 일본알프스전기의 지분(50 대 50)을 인수함으로써 27년의 합작 관계를 청산하고 독자경영권을 확보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LG전자부품은 고부가가치 성장품목으로 사업 확대를 추진했다. 수만 개의 부품을 찍어내더라도 수익성이 낮다면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성장을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집약사업을 찾아야 했으며,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때마침 부상하던 정보통신과 산업용 부품 분야에 주목했다.
1997년 LG종합기술원과 공동으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단말기용 핵심부품을 개발하고 이동통신 단말기 부품 사업에 진출했다. CDMA 단말기용 SAW필터(표면탄성파 필터)와 PA모듈(고주파 전력증폭기)을 국내 최초로 국산화하면서, 1999년 3월 글로벌기업인 모토로라와 부품공급계약까지 체결했다. CDMA 단말기용 핵심부품을 해외 유수 업체에 수출한 것은 LG전자부품이 처음이었다. SAW필터는 일정 대역의 주파수만을 통과시켜 이동통신 단말기의 송수신에서 혼선과 잡음을 방지하는 핵심부품이며, PA모듈은 이동통신 단말기의 고주파 신호를 증폭시켜 기지국까지 송출하는 핵심부품이다. 이전까지 이들 부품은 미국, 일본, 프랑스 업체들이 세계시장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LG전자부품도 이들 부품을 생산하면서 이동통신 부품 사업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게 됐다.

LG전자부품, SAW필터(1997)

이동통신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했고, LG전자부품은 외자 조달을 통해 투자자금을 마련했다. 이렇게 차입경영을 통해 시작한 신사업이 아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환율이 걷잡을 수 없이 상승했고, LG전자부품은 외화부채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결국 정부가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LG전자부품은 LG그룹 계열사 중 유일하게 퇴출기업 명단에 오르게 됐다.

LG전자부품, 양산공장 전경(1995)

첫 해외사업 진출, 중국 후이저우 생산법인

1990년대 들어 WTO 체제 출범과 함께 글로벌시장에서 무한경쟁시대가 예상됐다. LG전자부품은 사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해외생산기지 구축에 나섰다. 1993년 3월 중국에서 임가공 생산을 시작한 데 이어, 1994년 2월부터는 글로벌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중국에 현지 생산법인 설립을 추진했다. 이 시기 중국은 전자부품의 세계 최대 생산거점이면서, 전자제품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LG전자부품은 중국에 이미 진출해 있는 주요 고객사(LG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와 현지 업체들을 대상으로 납기 및 품질 대응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두 차례의 현지조사를 거쳐 광동성 후이저우(惠州)시로 공장입지를 결정하고, 1994년 7월 LG그룹의 법인설립 승인을 받았다. 중국 내 전자제품공장 대부분이 광동성을 비롯한 남부지역에 집중돼 있어 이 지역에서의 부품 사업 전망은 밝았다. 이후 법인설립이 가속화되면서 LG전자부품은 1994년 10월 총 450만 달러를 투자해 중국 후이저우 생산법인을 설립하고, 1996년 2월 1만 5,736㎡(약 4,760평) 규모로 공장을 완공했다. LG전자부품은 7명의 임직원을 현지에 파견하는 한편, 150명을 현지 채용했다. 중국 후이저우 생산법인은 초기 스위치와 가변저항기를 주로 생산하다가, 점차 튜너 등으로 생산품목을 확대해 나갔다. 중국 후이저우 생산법인이 설립되면서 LG전자부품은 중국시장에서 단순 임가공 단계를 벗어나 본격적인 해외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