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LG’의 이름으로 ‘따로 또 같이’ 성장하다(1985-1999)

4. IMF 외환위기의 암초를 만나다

LG전자부품과 LG포스타의 통합

1997년 11월 국가 초유의 외환위기 사태가 발생해 우리 경제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성장 위주의 사업규모 확대에 집중해온 상당수 기업이 부도를 내고 무너졌다. 전자부품산업도 예외가 아니어서 해태전자를 비롯한 굴지의 종합전자업체들이 부도를 피하지 못하고 비운을 맞았다.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관리체제에 돌입한 우리 경제는 IMF로부터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받았고, 정부는 5대 그룹사를 대상으로 빅딜을 추진했다. 이로부터 각 그룹사는 합병, 계열 분리, 매각, 청산 등의 방법으로 계열사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됐다.
LG그룹도 1998년 구조조정본부를 설치하고 사업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경남 양산에 본사를 두고 튜너와 모터, 스위치 등을 생산해온 LG전자부품은 장기간 경영실적이 악화되면서 부채비율이 높았고 거의 해마다 CEO가 교체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가 1998년 6월 LG 계열사 중 유일하게 퇴출기업으로 지정되는 수난을 겪었다.
퇴출기업 명단에 오른 LG전자부품 사원들은 대부분 일손을 놓다시피 한 채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생존’이라는 희망을 품고 출발한 1998년, 복리후생제도를 자진 반납하고 비상 경영활동에 돌입하는 등 전 임직원이 위기돌파를 향한 굳은 의지를 다졌으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제24기 LG C&D 혁신학교 입교식(1998)

퇴출 위기를 맞아 생존의 길을 모색하던 LG전자부품은 1998년 11월 LG포스타와 합병하는 길을 선택했다. LG포스타는 1971년 6월에 LG전자가 일본 음향기기 메이커인 포스터와 합작해 설립된 회사였다. LG포스타는 라디오 및 TV용 스피커와 그 부품을 생산하고 1990년대에는 하이파이용 및 자동차용 고급스피커 개발에 주력했다. LG전자부품은 뼈를 깎는 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튜너와 모터를 주력사업으로 앞세우고 이동통신용 부품을 신규 육성사업으로 추가하면서 사업의 명맥을 이어갔다. 통합회사 사명이 LG C&D(Component & Device)로 변경되면서 LG전자부품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LG정밀, LG C&D를 품다

LG정밀은 1990년대 들어 흑자기반을 유지하며 견조한 성장세를 보였다. 외환위기 때 LG정밀은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더욱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자체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998년 12월 어로용 정밀기기를 중심으로 하는 해양장비사업을 종업원 출자에 의한 분사(EBO) 형태로 새로 출범하는 법인에 양도했다. 임직원 20여 명이 자본금을 출자해 법인을 설립하고, LG정밀은 해양장비 관련 기술자료 일체를 이관했다.
그룹 차원의 사업 양도도 있었다. LG정밀은 1997년 ‘내비게이션’으로 불리는 자동차용 항법장치(Car Navigation System)를 세계 세 번째로 개발하는 성과를 창출했다. 유도무기, 레이더, 통신장비 등 방위산업 분야에서 축적한 첨단기술력으로 독자 개발에 성공했다. LG정밀은 1995년부터 일본의 자동차 전장부품업체인 자나비(Xanavi)와 국내 최초로 카멀티비전에 관한 기술제휴를 맺고 차량 전장품 사업을 본격화했다. 이후 자동차용 항법장치 개발에 성공하며 차량 전장 메이커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사업이 LG전자에 양도됐다.
이어서 LG정밀은 LG C&D 와의 통합을 숨 가쁘게 진행했다. 1999년 3월 1일, 첨단 방산장비와 통신용 고급 계측기를 주력제품으로 하는 LG정밀이 합병을 통해서 LG C&D가 보유한 정밀전자부품 기술을 인수 했다. 합병사의 사명은 존속법인인 LG정밀로 결정됐다. LG C&D 양산공장은 2005년 LG전자와 여러 중소기업으로 분할 매각됐다. LG C&D를 합병한 이후 LG정밀은 핵심 주력사업만을 남기고 한계사업의 분사와 매각을 추진하는 2단계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디지털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1999년부터 아날로그형 사업을 과감히 청산했다.

  • LG정밀, 일본 자나비와 카멀티비전 기술제휴 조인식(1995)

  • LG정밀과 LG C&D 합병(1999)

이에 따라 1999년 3월 국내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스위치·가변저항기 사업을 분사시켰고, 9월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의 스피커 사업을 임직원 출자에 의한 분사(EBO) 형태로 분리했다. 이와 함께 1999년 10월에는 첨단 계측기인 스펙트럼 분석기를 제외한 범용 계측기 사업을 전문 중소기업에 매각했다.
이 시기 전자제품의 지형도가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LG정밀은 멀티미디어와 이동통신 부품을 생산하는 첨단부품회사로 사업구조를 고도화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디지털 LG 경영’을 선언하고 디지털 핵심부품에 투자를 확대했다.
1999년 4월에는 CD에 정보를 기록하고 재생시킬 수 있는 CD-RW(CD-Rewritable)용 모터를 독자기술로 개발하고 국내 처음으로 양산했다.
이어 1999년 7월에는 TV용 디지털 튜너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LG정밀이 개발한 TV용 디지털 튜너는 해외 선진기업들보다 기술 수준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에 수출됐다. 이 해 세계 최소형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용 튜너 개발에도 성공하면서 LG정밀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여줬다. 그뿐만 아니라 디지털 위성방송 시장을 이끌고 있던 미국과 유럽에 위성방송 수신용 튜너를 수출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LG정밀, TV용 디지털 튜너(1999)

사업 구조조정에 따른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면서 LG정밀은 1999년 매출액이 5,000억 원을 넘어섰다(5,228억 원). 또한 317억 원의 당기순이익과 170%대의 낮은 부채비율을 기록했다.
한편 1999년 3월 LG C&D가 LG정밀에 합병되면서 양사 노조도 1999년 7월 26일 서울 본사에서 노조 통합에 상호 합의했다. 양사 노조가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한 후 신임 위원장 선거를 통해 통합노조를 출범시키기로 했으며, 1999년 8월 노조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 디지털 지상방송 튜너

  • 디지털 위성방송 튜너

LG마이크론에 닥쳐온 시련

LG마이크론은 연 매출 3,000억 원 정도의 작은 규모였지만 어느 회사보다도 높은 재무 안정성을 자랑했다. 세계 최고의 섀도마스크 기술력을 바탕으로 창사 이래 흑자실현을 계속 이어가며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특히 1990년대에 LG의 캐시카우 역할을 할 정도로 풍부한 자금을 기반으로 견실한 재무구조를 다져 나갔다.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도 LG마이크론은 원화절하와 고금리라는 효과를 누리면서 흔들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유자금 640억 원을 회사채에 투자한 것이 문제였다. LG마이크론이 투자했던 국내 모 대기업이 퇴출되면서 채권 회수 불능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이 여파로 LG마이크론도 현금 유동성 문제가 생기면서 임직원들의 상여금이 몇 달씩 미뤄졌다. LG마이크론의 대표이사와 재경담당 임원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가운데, 새로운 경영진을 맞아 전 구성원이 1년간 회사채 회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 회사채의 절반은 회수에 실패했고, 설상가상 주력제품이던 섀도마스크가 공급과잉 상태로 전환되는 등 회사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위기를 맞았다.
LG마이크론은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기본을 다지며 전사 차원의 대대적인 품질혁신 활동을 벌이는 한편, 원가절감과 생산성 배가 운동을 전개하는 등 온 힘을 다한 노력으로 이익 극대화를 실현해 나갔다. 노조는 자체적으로 임금 삭감을 결의했고, 이에 대해 회사는 인원 감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답했다. 부품 공급이 밀릴 경우 전 직원이 3교대로 휴일 없이 근무에 나섰으며, 사원 부인들이 생산설비에 직접 뛰어들어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경영진과 회사 구성원들 간의 끈끈한 유대와 신뢰를 바탕으로 고난의 시간을 함께 헤쳐 나간 결과, LG마이크론은 2000년 말 회수하지 못한 나머지 회사채의 대부분을 청산하고 코스닥 등록을 통해 기업공개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LG마이크론, R&D 비전 선포식(2006)